보이기는 하지만 흐릿하게 보이는 것도 불행하기는 마찬가지다. 요즘 같은 현대 사회에서는 밝은 조명과 컴퓨터, TV, 독서 등 시력을 나쁘게 할 요인들은 엄청나게 늘고 있다. 누구나 언제나 시력이 나빠질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는 것이다.
안경은 이 같은 불행을 사라지게 만들어 줄 유일하고 중요한 도구 중에 하나다.
세상을 밝게 볼 수 있는 도구인 안경.
![]() |
| ◇ 학봉 김성일 선생이 사용하던 안경으로 가장 오래된 안경이다.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직접 만든 가능성이 높다. ⓒ대구산업정보대학 제공 |
우리나라에 안경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언제부터일까?
아쉽게도 정확하고 명쾌한 답을 줄 수 있는 문헌자료나 실물자료 등의 부족으로 정확한 기원을 알 수 없다.
다만 임진왜란 전후 시기로 추정할 뿐이다.
안경 사용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의견이 외부 전래설과 자생설 두 가지로 나눠지고 있다.
외부에서 안경이 전래돼 왔을 것이라는 추측은 경주에 있는 신라고분에서 페르시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유리그릇의 출토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미 신라시대에 안경의 재료가 되는 유리가 전래됐다는 것은 그만큼 수입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지봉(芝峯) 이수광의(李睟光 1563~1628)의 ‘지봉유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안경은 노인이 책을 볼 때 쓰는 것으로 작은 글자를 코게 보이게 한다. 근래 들은 소식에 의하면 명나라 장수 심유경과 왜의 승려 현소가 모두 노인용 안경을 쓰고 가늘고 작은 글씨를 읽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보지 못하던 것이다. 안경은 해방(조개 이름)껍질로 만든다고 한다. 또 판별하기 어려운 낡은 문서를 수정으로 햇빛에 비추어 보면 분별할 수가 있다고 한다.
이는 16세기 말 안경이 외국의 사신들에 의해 들어왔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안경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보다 많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우선 지난 1981년 경주시 월성군 성부산 인근에서 발견된 용광로와 1985년 1월 경주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유리를 녹인 그릇과 제작도구 등이 발굴되면서 신라시대 직접 유리를 생산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특히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선생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안경은 직접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성일 선생의 안경은 코 모양이 조선시대 청화백자 목 부분의 띠 모양을 닮았고, 특유의 투박함과 섬세함 등은 조선시대의 예술품과 많이 닮아있다.
또 안경집의 경우 겉이 옻칠되어 있고 놋쇠로 된 배꼽장식, 가벼운 피나무 재질 등은 조선시대 전통적인 공예품과 같은 처리방법이다.
![]() |
| ◇ 1700년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실다리 안경 ⓒ대구산업정보대학 제공 |
조선후기 언어학자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문집 ‘이재전서’ 가운데 ‘동경수정안경명(東京水晶眼鏡銘)’에는 안경과 관련된 중요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을유년 무성 고을의 원인 김이신(金履信)이 내가 눈병을 앓고 있는 것을 알고 이 안경을 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경주 수정이다. 옛날 민기(閔機 1568~1641) 공이 경주에 있을 때 구한 것인데 근래에 작고한 정승을 지낸 정헌 공에게로 정해 오던 것이다. 지금 내가 갖고 있게 되었지만 나 또한 공물을 가지고 있으니 그대에게 준들 무슨 거리낄 게 있겠는가? 그 재질이 두꺼워 떨어뜨린다 해도 부서지지 않으며 그 쓰임새가 넓어 노소를 가릴 필요가 없으니 그대는 이것을 귀중히 여기라”
이 같은 문헌자료와 근거 재료들은 안경이 자생적으로 제작됐다는 데 설득력을 주고 있으며 1580년대까지 안경이 일부 수입됐다가 1600년대 초부터는 국내에서도 제작이 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 후반부터는 우리 역사에서 안경이 자주 등장하게 된다. 일반화가 됐다는 의미다. 당시에 그려진 민화나 초상화, 풍속화, 불화 등에서 안경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고 ‘정조실록’에는 정조가 안경을 사용했다고 명시돼 있다.
<다음에 계속>
데일리안 대구경북 최용식 기자(ssen@dailian.co.kr)
















